나도 당신도 서로의 밤에 침입해
어느 페이지라도 할 것도없이,
손에 잡히는대로
열렬히 서로를 읽어나간 것이겠죠
.
내게는 사랑에 대한 첫 독서가
당신이란 책이였고
.
행복했고
열렬했어요
.
어느 페이지는 다 외워버렸고
어느 페이지는 다 찢어없앴고
.
어느 페이지는 슬퍼서 두 번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지만
.
어쨌든
즐거웠습니다.
소란, 박연준

모든 병든 개와 모든 풋내기가 그러하듯 나는 내 운명 앞에서 어색하지 그지 없다, 그대를 오랫동안 품에 안았으나 내 심장은 환희를 거절하고 우울한 예감만을 가슴 복판에 맹렬히 망치질 하였다,
우연이란 운명이 아주 잠깐 망설이는 순간 같은 것, 그 순간에 그대와 나는 또 다른 운명으로 만났다, 그런 운명과 우연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지금 서로의 목전에서 모래알처럼 산지사방 흩어지고 있는데
그대에게서 밤안개의 비린 향이 난다, 그대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 어둠 속 내륙의 습지를 돌아와 내 눈동자에 이르나 보다, 그대는 말한다, 당신은 첫 페이지부터 파본인 가여운 책 한 권 같군요, 나는 수치심에 젖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묻는다,
여기 모든 것에 대한 거짓말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진실이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덜 슬프겠는가, 어느 것이 먼 훗날 불멸의 침대 위에 놓이겠는가, 확률은 반반이다, 확률이란 비극의 신분을 감춘 숫자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계산법이 아닌가
눈을 떴을 때 그대는 떠났는가, 떠나고 없는 그대여, 나는 다시 오랜 습관을 반복하듯 그대의 부재로 한층 깊어진 눈앞의 어둠을 응시한다, 순서대로하면, 흐느껴울 차례이리라

어느날 문득 연인의 자리가 사라지니 결핍도 없고 대상을 갈구하는 정념이 거품처럼 사라짐을 깨달았다.
내가 열정을 느껴 다가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타나서 나 자신이 열정을 소비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던 건 아닌가 이제는 생각한다. 존재하기에 오히려 결핍을 느끼는 것.
꽃 같은 그대, 나무 같은 나를 믿고 길을 나서자.
그대는 꽃이라서 10년이면 10번은 변하겠지만
나는 나무 같아서 그 10년, 내 속에 둥근 나이테로만 남기고 말겠다.
타는 가슴이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길 가는 동안 내가 지치지 않게
그대의 꽃향기 잃지 않으면 고맙겠다.
내가 묘사하는 것은 나 자신. 몽테뉴.
지금이 아니면 안되는 일이 있는 거예요.
지금 갖지 않으면 안되는 것,
지금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지금 만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
지금 이 순간에만 반짝이는 것,
그대가 망설이는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것,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것.
황경신
행복함을 느끼는 순간이 더 잦아졌다. 서늘히 등을 훑고 지나가는 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감정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나를 돌보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 자신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을 가장 잘 돌보고 싶다. 나의 엄마도, 당신의 분신인 날 그렇게 돌보고 사랑했다. 훗날 만날 나의 분신도 그렇게 돌보고 사랑할 사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오면 그저 마음껏 사랑하고 아낌없이 돌봐주면 되는 것이다.
오래된 습관을 반복하듯 나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대는 묻는다, 왜 어둠을 그리도 오래 바라보냐고, 나는 답한다, 그것이 어둠인 줄 몰랐다고, 그대는 다시 묻는다, 이제 어둠인 줄 알았는데 왜 계속 바라보냐고, 나는 다시 답한다,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다고, 그대는 내 어깨 너머의 어둠을 응시하며 말한다, 아니요, 당신은 멀쩡히 깨어있어요, 너무 오랜 고독이 당신의 얼굴 위에 꿈꾸는 표정을 조각해놓았을 뿐
이 밤에 열에 하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열에 하나는 무척 외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열에 하나는 흐느껴 울기도 한다, 이 밤에 그대와 내가 이별할 확률(=0.1x0.1x0.1)을 떠올리면 내 얼굴은 저 높이 까마득한 어둠 속 백동전으로 박힌 달 표면처럼 창백해진다, 나는 다만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시간의 완곡한 안쪽에 웅크리고 누워 잠들고 싶은데, 지금 나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잊고 번민으로 오로지 번민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인생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살아 나가라
바람이 불 때 흩어지는 꽃잎을 줍는 아이들은 그 꽃잎들을 모아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꽃잎을 줍는 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만족하면 그뿐.
라이너 마리아 릴케